1차 창작 BL소설 「Immortality」 1,2권 完 + 자석책갈피 1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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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빙의] 형님을 사랑했다. 형님과 동생을 대신해서 참전한 전쟁에서 병으로 죽은 뒤 눈을 떴을 때, 나는 백치였던 내 동생이 되어 있었다.[광공,후회공,다정공,형님공X짝사랑수,병으로죽었수,강수,능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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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로망스 부스 D05/06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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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스로가 정한 선은 생각보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다짐해 봐도, 렌바르트는 자신의 형제인 훼이온 폰 로프론트를 볼 때면 머릿속에, 심장에 스스로가 새겨 넣은 각인에 불을 지르려 했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선을 넘기 위한 우매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훼이온의 심해를 빼닮은 잔잔하고 음습한 빛을 고스란히 담은 청색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에 늘 그랬듯이 렌바르트는 자신의 욕심으로 점철된 그 행동을 목도하고 몇 번이고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끝없는 반복이었다.
하지만 그 반복을 그만둘 것을 그랬다.
가져선 안 될 마음을 품은 것도 모자라, 그 욕망을 채우고 충동에 따르기 위하여 망설인 끝에 결국 환멸과 함께 결실을 보는, 그러한 어리석음에 후회하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가 정했던 그 선을 과감히 넘어버릴 것을 그랬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로프론트 가의 차남, 렌바르트 폰 로프론트는 자신의 형인 훼이온 폰 로프론트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그 감정은 단언하건대 불변이었다. 영혼에 새겨진, 영원한 각인이었다. 그의 본질이나 다름없었다.
훼이온을 사랑하는 렌바르트의 감정은,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25년의 삶을 모두 단정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올곧고 맑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더없이 추악한 죄 깊은 감정이었다. 결코 가져서는 안 될, 이질적인 것.
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그런 개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감히 자신 ‘따위’가 ‘그’ 형님께 연심을 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를 질책하며 훼이온을 향한 마음을 몇번이고 접으려 했는지, 자기혐오를 거듭하며 도망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을 해도, 끝끝내 렌바르트는 훼이온을 사랑했다. 놓을 수 없었다.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한이 있어도, 훼이온을 향한 마음을 접는 것은, 죽는 것과 다름없기에 결코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놓을 수 있다. 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의가 아니다.
이제는 점점 렌바르트의 뜻을 벗어나는, 썩어가는 육체 때문이다.
렌바르트는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손에 감겨드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손끝의 감각은 벌써 희미하다.
그의 삶을 증명하듯 살아있는 검으로 만들어진 강인한 육체는, 그 속에서부터 삐걱거리며 아슬아슬하게 육체를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움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성처럼 따라붙어 렌바르트를 갉아먹었다.
렌바르트는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힘을 주어 몸의 무게를 지탱했다.
움직일 때마다 어느 곳에서부터 전해졌는지도 모를 둔한, 혹은 찌르는 고통이 빠르게 퍼져 숨 한번 내쉬기도 전에 전신을 맴돌았다.
그러나 온몸을 칼로 휘젓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살아 있는 밀랍인형처럼 무표정했다.
그가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정교하게 깎아 만든 무표정이란 이름의 가면은 죽어가는 육체에서 유일무이하게 생기 있는 것이었다.
일정한 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스쳐 지나가는 이들은 물론, 렌바르트가 향하는 방의 주인조차도, 렌바르트의 위태로움을 눈치채지 못했다.
걸음이 멈췄다. 그 어느 때보다 뻣뻣하게 깃을 세운 그의 단정한 차림을 눈에 담은 시종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나무를 깎아 그 어느 한 부분 소홀한 곳 없이 섬세히 다듬은 단단한 문이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그 무언의 소리가 마치 렌바르트의 몸이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았다.
문이 열리자 렌바르트는 망설임 없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다년간, 자신의 일상에 늘 함께했던 익숙한 향이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붙었다.
종이 냄새. 약간은 코끝을 비릿하게 만드는 잉크 냄새. 그리고 렌바르트가 평생 얽매인 형제의 특유의 향이 한데 뒤섞여 렌바르트의 정신을 짧은 시간 동안 헤집어놓았다.
렌바르트는 익숙하게 제 안에 생긴 내부의 균열을 감추고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태생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훼이온의 모습을 담아낸 순간, 손끝이 떨리며 몸을 갉아먹던 고통이 일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찾아온 행복이었다. 기척을 들었음에도 훼이온의 뚜렷한 청색 눈동자는 렌바르트를 향하지 않았다.
렌바르트는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미동도 없이 서류만 보고 있는 훼이온의 익숙한 모습에 속으로 쓰게 웃었다.
유독 렌바르트에게만 지독한 저 무심함을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심장은 어찌 새삼스럽게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다른 고통을 새로이 새겨 넣는 것인지.
덧대어진 고통에 표정이 더더욱 굳는 것을 느끼며, 렌바르트는 훼이온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팔랑. 하얀색 종이가 새로이 훼이온의 손에 붙잡힌 순간, 기다림은 결실을 맺었다.
“사하트 광산의 소유권을 두고서 제국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나타났다.”
목소리는 늘 그랬듯 담담했다. 듣는 사람이 거리감을 느낄 정도의 냉정함이 고스란히 묻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의적인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고스란히 내뱉을 뿐인, 그 어떤 감정도 묻어나오지 않은 무심함 그 자체인 목소리. 렌바르트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 목소리에, 저 무심함에 상처를 받은 적이 수 없이 많았으나 이제 와서는 이 무심함조차 그리워질 듯했다.
아니, 분명 그리워지리라. 렌바르트는 훼이온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며, 지나가듯, 남의 일처럼 그리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순간 숨이 막혔다.
“폐하께서는 로프론트 가의 사람이 참전하라 하셨지.”
로프론트 가의 현 구성원은 공작인 훼이온과 차남 렌바르트, 그리고 올해로 19살이 되는 삼남, 백치 아젤레트였다.
대대로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로프론트 가. 이번 대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렌바르트는 황제의 의도를 파악했다.
훼이온에게 로프론트 가의 사람들 중 한명이 참전하라고는 했지만, 그건 허울뿐인 말일 뿐 실제로 황제가가 노린 사람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렌바르트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 명령을 들을 수 없으니까.
아무리 약소국과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현 공작인 훼이온이 혹여 전쟁에서 부상을 입거나 죽는다면 따로 후계가 없는 훼이온을 대신하여 공작이 되는 것은 렌바르트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렌바르트는 황제에게 있어서 그리 좋은 패는 아니었다.
인연이 그리 깊지 않았다.
렌바르트가 검을 맹세한 것은 훼이온이였지만, 그 충성심이 고스란히 황제를 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렌바르트는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얄팍한 질투.
자신이 알지 못하는 훼이온을 알고 있는 자. 그것이 황제였기에, 렌바르트는 제국민이라는 자각은 있어도 현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그리 깊지 않았다.
물론, 황제가 염려한 것은 훼이온이 죽었을 경우, 그 후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그’ 공작이나 되는 훼이온이 이런 별 볼일 전쟁에 참전할 만큼 가치가 낮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를 대신하여 보내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당히’ 황제의 신뢰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렌바르트의 이름이 필요했다.
삼남인 백치 아젤레트 폰 로프론트는, 당연히 처음부터 염두 해두지 않았으리라.
전쟁에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백치인 19살인 아젤레트를 전쟁으로 보낸다면, 그것은 전쟁에 참전하는 이들에게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렌바르트 뿐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각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자신이 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망설임도 없이 나온 곧은 대답이었다.
렌바르트의 의연한 목소리에, 훼이온은 펜을 들어 새로 꺼낸 양피지에 글을 써내려갔다.
짧은 시간 동안 침묵이 집무실을 감돌았으나, 그 침묵을 깬 것은 훼이온이었다. 여전히 렌바르트를 보지 않은 채로, 그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끝내놓았다. 내일 새벽, 황궁에서 퀘일토스의 말을 보내올 것이다. 그것을 타고 사하트로 가도록.”
미안하다느니,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둥의 겉치레의 말 한마디 없이, 훼이온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렌바르트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놀랄 필요도, 동정하는 척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만약 렌바르트가 스스로 참전하겠노라고 대답하지 않았어도, 렌바르트가 알고 있는 훼이온이라면 망설임 없이 전쟁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 분명했다.
전쟁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승리가 확실한 소규모의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에서는 항상 언제, 어디서 누가 죽을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외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타노이스 제국에서 일어난 분란들을 제압하고, 단 한 순간에 대륙에서 제국의 위상을 끌어 올린 이들 중, 혁혁한 공로를 제일 많이 쌓은 것이 바로 로프론트 가의 형제들이니까.
그만큼 그들은 어린 나이부터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었다. 그렇기에 절실히 깨닫고 있는 사실이었다.
훼이온은 황제에게 보낼 임명장의 작성을 끝낸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렌바르트에게 나가란 신호를 보냈다.
여전히, 그의 냉정한 시선은 단 한 번도 책상 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렌바르트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을 손으로 쥐어뜯는 고통을 느꼈다. 그가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훼이온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담기 위해 청회색 눈동자로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망막에 새겨 넣는 훼이온의 모습 하나하나가 사랑스럽다. 단순한 개념을 내포한 언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정도였다.
렌바르트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더는 훼이온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니까.
렌바르트는 죽는다.
전쟁이 아니어도 렌바르트는 분명 죽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었으며, 미래를 보는 그의 어미가 은밀하게 귓가에 속삭여준 불멸의 말이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어렸던 렌바르트의 작디작은 두 손을 꼭 잡고서, 그의 어미는 울면서, 네가 25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병으로 죽든, 사고로 죽든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며 오열했었다.
그리고 어미의 말대로, 렌바르트의 몸은 내부에서부터 산 채로 썩어가기 시작했다.
물에 깎여가는 돌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죽음이란 이름의 벌레가 렌바르트를 갉아먹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은 24살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명명백백하게 렌바르트의 육체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전에 머물렀던 제 힘을 더 이상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꿈결의 끝자락에 가서야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듯 불시에, 갑작스럽게 제 어미의 말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25살이 된 지 5개월이 지난 지금에서는 몸이 썩어가는 고통이 노골적으로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완전히 렌바르트의 심장에 자리 잡고 번데기를 만들어 그것을 찢을 일만 남은 죽음은, 곧 우화할 것이다.
렌바르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자신에게 이런 운명을 선사한 신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외려, 훼이온 폰 로프론트를 자신 따위가 감히 사랑한다는, 그 이질적인 감정을 품고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죄를 끊어준 것 같아서 감사했다.
무엇보다, 전쟁터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몸이 언제까지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자신의 죽음은 전쟁터가 될 것이 아닌가.
로프론트 가의 총명한 차남이 병에 걸려 죽는다면 로프론트 가의 명예에 금이 갈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병사(病死)한 것보다는 전사(戰死)가 나았다.
하지만 막상, 죽기 직전까지 훼이온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적어도 5개월은 늘어질 전쟁에 참전하느라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니, 욕심이 생겨버렸다.
오래전에 끊어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욕심이 훼이온을 앞에 두고서 고개를 쳐든 것이다.
“…….”
상념에 잠겨있던 렌바르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훼이온이 렌바르트를 보고 있었다.
렌바르트의 청회색 눈동자와는 다르게 확실한, 아름답고 곧은 빛의 청색 눈동자를 가진 훼이온의 눈동자는 지독히 차분하고 맑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어서 렌바르트는 그 눈에 비친 자신의 더러움에 숨을 삼켰다.
뒤늦게 가까스로 새어 나오는 그 숨이 당장이라도 멎을 것만 같이 미약했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렌바르트 본인뿐이었다.
“나가지 않을 건가, 경?”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각하.”
무슨 각오로 이런 말이 튀어나갔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발작처럼 내뱉은 말에 놀라기도 잠시, 그보다 먼저 제 안을 뒤흔드는 혐오감에 렌바르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소원 성취나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리도 무식하게 내뱉어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욕심이니까.
그러니 이것만큼은 용납되리라. 그렇게 자위하며 렌바르트는 훼이온의 얼굴을 살폈다.
렌바르트의 말에 묘하게 미간을 좁히는 훼이온의 표정에 심장이 철렁거렸으나, 렌바르트는 애써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서 훼이온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렸다.
훼이온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분명 짧건만, 렌바르트가 느꼈던 그 어떤 기다림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기에 단 1초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았다.
뻣뻣한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에서 비롯된 묘한 간질거림이 렌바르트의 목 아래에 턱 걸렸다.
“뭔가.”
훼이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감정을 억누른 듯한, 메마르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렌바르트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그가 자신의 예의 없는 말에 대답해주었다는 사실 하나에 놀라 멍하니 훼이온을 볼뿐,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무표정했던 렌바르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당혹은, 훼이온에게도 거짓 없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훼이온은 동요도 없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렌바르트는 속으로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욕심이지만, 부정적으로 보일 것을 각오하고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불쾌한 기색은커녕,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다니.
그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웠기에, 제법 긴 시간이 침묵에 소비되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훼이온이 펜촉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작은 소리에 정신을 차린 렌바르트는 묘한 흥분에 들떴던 호흡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제 이름, 불러주시겠습니까.”
훼이온의 청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은 렌바르트는 그가 불쾌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실례했습니다.’라고 내뱉듯이 말한 뒤 도망치듯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아니, 도망쳤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은 괜찮다. 억누르지 못한 충동으로 무심코 내뱉어봤을 뿐이다.
렌바르트는 자칫 잘못하면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가 꺾이지 않도록 악을 쓰듯이 힘주어 걸음을 옮겼다.
문간까지 다가가기 전에 몇 번이고 휘청일 뻔했지만, 속으로 괜찮다, 익숙하지 않던가 하고 세뇌하듯 중얼거리며 버텨 문고리를 잡는 것에 성공했다.
괜찮다.
익숙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비참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훼이온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죽기 전에 자신을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훼이온의 반응을 보니 이제껏 느낀 적 없던 막심한 후회와 동시에 슬픔이 밀려왔다. 어리석은 욕심 따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방문이 열리고, 렌바르트는 다시 인사를 올린 뒤 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망설임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럽게 방 밖으로 도망치듯 나온 렌바르트의 모습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시종이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렌바르트.”
문이 닫히기 직전, 앞으로 내디딘 순간에 들려오는 훼이온의 목소리에 렌바르트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한참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렌바르트는 그대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고, 멀게만 느껴졌다.
허리까지 차오른 눈길을 맨몸으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곧, 렌바르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묵직하게 잡혀 드는 손잡이를 거칠게 잡아당겨 열고, 쫓기듯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간 렌바르트는 문이 닫히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하…….”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그대로 얼굴을 가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다.
몸속 깊숙이 새겨진 고통은, 신기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렌바르트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훼이온의 목소리를 계속 떠올리며, 울면서 웃었다.
잔인하다. 자신이 불러달라고는 했지만, 마지막에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다니.
행복했다. 그리고 슬펐다.
상반되는 감정들이 렌바르트의 안을 머물며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괴로움조차도, 그리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훼이온의 목소릴 다시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희미하게 가라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리 다정히 불러줄 줄 알았으면.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렌바르트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스스로를 억누른 뒤에,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옷자락으로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그리고 언제 울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년을 거듭해 만들어낸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무표정이라는 이름의 딱딱한 비애(悲哀)의 가면이었다.
렌바르트는 사람의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자신의 방에 유일하게 색채를 뒤집어쓴 책상에 기대어두었던 애검을 향해 다가가며, 애써 흐트러진 호흡을 다듬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마지막 전쟁을, 아니 훼이온 폰 로프론트를 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애검을 움켜쥐었다.
타노이스 제국력 432년. 제브릴의 달.
(중략) 사하트 광산을 두고 발발한 전쟁은 5개월 만에 동(東)사하트 람슐리츠 회전(會戰)에서 타노이스 제국군의 완벽한 압승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선두에서 군대를 이끌던 로프론트 가의 차남, 렌바르트 폰 로프론트가 사망. 종전협정이 끝난 일주일 뒤, 그의 시신이 로프론트 가로 보내졌다. 그와 동시에, 로프론트 가의 가주인 훼이온 폰 로프론트가 광인(狂人)이 되었다는 소문이 황도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략)
-아르겐 레벨로니텔 저, 「제국의 시대_본문 155p 발췌」
2
렌바르트는 자조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웃음이 나왔다. 몇 번을 떠올려 봐도 제 근본에 뿌리를 틀어박은 듯이 선연했다.
자신의 몸이 실 끊긴 인형처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땅에 처박혔을 때, 흐릿해져 가던 정신 위로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르던 그 감정은 깨우쳤던 것 이상으로 추악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욕심이었다.
렌바르트는 그 감정을 전장을 달리는 순간부터 미련 없이 털어냈을 것이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은 그것을 털어내지 못했다. 세뇌하듯 겹겹이 쌓아 올려 생각을 거듭했던 확신은 더 없는 오만이며 부질없는 맹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한탄하면 뭐하나. 후회하면 뭐하나. 렌바르트는 죽어가면서 후회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죽었다. 이번은 맹신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렌바르트는 죽음을 느꼈다. 죽음에 잠겨가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몇 번이고, 그 후회 속에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는 소스라칠 정도로 선연하여, 렌바르트의 근본마저 아주 작은 손짓 하나로 뒤흔들어버렸다.
그러나 그 공포는 이내 평온으로 바뀌었다. 봄볕이 내리쬐는 안락한 풀밭에 몸을 뉘이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아니,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렌바르트가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완벽한 평온의 세계.
죽은 뒤의 세상은 온화함을 지닌 세상이라 하던 신관들의 말처럼, ‘육체’적인 상태로는, 굉장히 평온했다.
렌바르트는 자신의 몸의 곳곳을 감싼 따뜻하고 포근한 온기가 죽어야만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짧은 평온함마저도 육체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렌바르트의 정신은 서리가 얼어붙은 듯한 냉기를 품은 후회에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벌이었으며, 암흑도 빛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남겨진 원인이었다.
그 원인은 렌바르트가 품은 유일무이한 미련에서 새 생명을 얻어 피어난 새싹이었다.
훼이온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했던 렌바르트의 가슴은, 전장을 누비는 내내 계속해서 호소했다.
그리고 그 호소를 애써 무시하는 렌바르트를 질책하듯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혔다.
조금 더. 더. 훼이온 폰 로프론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고 속삭였다. 몇 번이고. 그것이 자신이 부여받은 삶이라 토로하듯이 렌바르트에게 속삭였다.
귀가, 머리가 산산조각 날 정도의 날카로운 이명을 울리며 렌바르트를 옥죄기 시작했다.
과거에 ‘기회’ 가 있었을 때 훼이온에게 아무리 혐오의 시선을 받더라도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를 질책하며, 그나마 남은 렌바르트의 정신마저 죽여가고 있었다.
렌바르트는 눈물을 흘렸다. 죽어도 피부에 닿는 그 눈물의 감촉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 감촉이, 온기가 너무나도 선명하여, 렌바르트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눈가를 닦았다. 닿았다. 미끈거리고, 손등에 묻은 눈물이 공기와 닿아 차갑게 식으며 손등에서 말라갔다.
내면의 세계에서 갉아 먹히고 있던 정신이 한순간에 끌어올려 졌다. 고통이 사라졌다. 그러나 렌바르트는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손을 아래로 내렸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힘없는 손에 힘을 주어, 심장이 있을 부분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의 감촉은, 아플 정도로 낯익은 감촉이었다.
심장이 덜컹거리며 큰소리로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에 더 놀란 듯, 호흡은 절박함에 가까운 헐떡거림으로 번졌다.
죽었을 터인 심장이 뛰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떠올린 렌바르트의 처절한 심정을 대변하듯 턱 막힌 채로 나오는 거친 호흡에, 렌바르트는 자신이 죽어 사후 세계에 있기를 절실히 기도하며 눈을 떴다.
뜨고, 깜빡였다.
한 번에 눈에 비친 사물을 담아내지 못한 망막이 빛을 졸라매듯 모아 눈에 세상을 담을 때까지, 렌바르트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그저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거칠어졌던 호흡이 멈췄다. 눈이 담아낸 세계는 렌바르트에게 잔혹할 정도로 익숙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밀하기 그지없는, 양 날개를 펼친 황금 새. 새의 양 날개 밑에 서로 맞물린 두 자루의 검. 검을 감싼 여명을 상징하는 크라시아 꽃무늬. 그 광대한 그림이, 높은 천장에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로프론트 가의 직계들만 사용하는 방 천장에만 그려져 있는 그림에, 렌바르트는 홀린 듯, 누워있던 침대에서 상체를 들어 올리다가 몸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한 번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감탄인지 비탄인지 모를 짤막한 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갔다. 그 소리가 처절했다.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살아있는 거지?
오로지 그 의문뿐이었다. 살아있다.
단 하나.
그렇게 살기를 바랐는데, 막상 살아 있으니 그 무게가 버겁다.
몸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끔찍하고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허공에 닿은 렌바르트의 눈빛은, 죽을 때 자신을 몇 번이고 좀먹었던 썩어 문드러진 공포마저 망각한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황망한 빛으로 반짝이며 저가 있는 공간을 담아냈다.
렌바르트의 현명한 머리는 그저 살아있다는 그 하나 자체에 집착하여 자신이 있는 방이, 몸이, 낮아진 시야가 낯익지만 낯설다는 것을 곧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이 뚜렷한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렌바르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리라.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곧바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자신의 변화를 깨달은 듯이 렌바르트는 몇 번이고 손을, 몸을,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목까지 차오른 비명을 억누르며 몸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이불을 끌어내렸다.
이어 기어가듯이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려 일어났다. 신발을 신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서툰 걸음으로, 방 한구석에 자리 잡은 거울을 향해 걸어갔다.
당장 넘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휘청이는 걸음이었다. 렌바르트는 입술을 깨물며 잘 깎여진 거울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넘어지듯 그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상에 렌바르트는 생각하는 것 마저 잊어버리고 망연자실하게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거울에 비친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순, 이것이 꿈인가 싶었다.
죽었는데 꿈이라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지만, 렌바르트는 그것을 절실히 바랐다. 꿈이 아니고서야. 결코, 이런 끔찍한…….
손이 떨렸다. 손바닥에 닿는 빳빳한 카펫의 감촉은, 이내 손바닥에서 스며든 땀에 조금 부드러운 감촉으로 바뀌었다.
렌바르트는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 홀린 듯이 거울에 비친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거울 속의 ‘자신’도 눈을 깜빡였다. 가슴이 크게 들썩인다. 고개가 힘없이 떨어진다. 다시 들린다. 입술이 떨린다.
아아, 머릿속으로 인식하고, 행한 자신의 행위를 거울 속의 ‘자신’은 보란 듯이 그대로 구현해냈다.
렌바르트가 알고 있는 이 ‘몸’의 본래 주인은, 대부분 멍한 표정으로 있거나 이따금 아이처럼 해맑게 웃을 때가 전부인, 두 가지의 표정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렌바르트의 놀람을 고스란히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참으로 낯설었다.
그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자신’이라는 사실에 렌바르트는 힘이 풀린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거울에 바짝 붙어 양손으로 차갑고 매끈한 면에 손을 올렸다.
손에 닿는 냉기.
그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동생’의 몸.
무너졌다. 본능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굳이 거울을 보며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두려울 정도로 선명한데. 내뱉어지는 숨결이 이리, 따뜻한데 어찌 알지 못할까.
렌바르트 폰 로프론트가 아젤레트 폰 로프론트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찌 깨닫지 못할까.
“끄읍…….”
꽉 눌린 신음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공간을 나직하게 흔들었다.
심장에서부터, 숨이 턱 하고 차올랐다. 토해내기도 전에 막혔다.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흐느낌이 새어나갔다.
몸을 웅크렸다. 점점 전신을 감싸오는 죄책감에, 삶의 무게에, 사랑하는 동생의 몸을 빼앗아 그리 집착했던 어리석은 삶은 연명했다는 자괴감에, 웅크린 몸은 한없이 작아졌다.
아젤레트.
어째서?
내가
살아있다.
몸을 빼앗았다.
이어지지 못한 생각들이 단편적으로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리 떠오른 생각들은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한 가지를 뻗어 머릿속을 한순간에 옭아맸다. 조였다. 숨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고통스러운 허상의 통증이었다.
렌바르트는 소리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낯익었다. 낯익은 것뿐만이 아니다. 이 손을 잡았을 때의 감촉과 맞닿았을 때의 체온이 이다지도 선명히 떠오르는데, 어찌 자신이 아젤레트 폰 로프론트가 되어있는지.
렌바르트 폰 로프론트의 삶은 확실히, 그 전장에서 끝이 났다.
얼어붙던 숨결. 멎어가는 심장의 비명. 썩어 죽어가던 몸이 삐걱거리던 그 파열음.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자신은 이곳에 살아있다.
아젤레트의 몸으로.
끝났어야 할 삶에 미련을 가지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욕심부린 그 벌일까.
렌바르트는 자신 때문에 삶을 빼앗기고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대신해서 심연의 공포에 가라앉은 것인지 모를 아젤레트를 떠올렸다.
아젤레트.
수 없이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렌바르트는 절망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동생. 천재만 태어난다는 로프론트가에 유일하게 백치로 태어나, 모든 모멸을 겪었던, 여리고 여린, 사랑스러운 자신의 동생.
렌바르트는 로프론트 가를 대대로 모시는 집사 집안의 에비텔마저 무시하던 아젤레트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아젤레트는 백치였지만, 로프론트 가의 핏줄 중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웠다. 단연 외모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존재. 그 웃음. 이따금 뭉개진 발음이었지만, 명확하게 ‘형아’라고 부르며 렌바르트의 품에서 꼬물거리던 그 체온. 렌바르트는 아젤레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훼이온조차 인정한 소중한 동생이었다.
렌바르트는 항상 시간이 날 때면 하루에 몇 번이고 아젤레트를 찾아가 그 옆에 꼭 붙어서, 혹은 안고서 책을 읽어주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해주었다.
참전하기 전날에도, 그 어느 때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지막으로 작별인사까지 했다.
단언하건대, 훼이온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사랑스러운 동생의 몸을 빼앗은 형이었다.
큰 소리로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를 아젤레트의 몸으로 우는 것은 더 없는 사치라는 생각에, 감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쌓여가는 죄라는 생각에 렌바르트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신에게 고해하듯이 밀려오는 감정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숨을 죽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따금 소리에 민감해져 놀랄 때가 있는 주인을 배려한 것이리라.
문을 연 시종, 테오는 당연히 보여야 할 곳에 자신의 주인인 아젤레트 폰 로프론트의 그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순간적으로 당황했다가 이내 방구석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웬만해서는 스스로 잘 움직이지 않는, 아니 거의 움직임이 전무한 아젤레트가, 그 약한 몸으로 어떻게 거울까지 갔는지 몰라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사실에 테오는 놀란 얼굴로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주인을 불렀다. 물론, 주인이 놀라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한 작지만 뚜렷한 목소리였다.
“도련님.”
테오가 부른 도련님은,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웅크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차마 고개도 들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테오는 그것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도련님!”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움찔 떨렸다. 렌바르트는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아니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드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에 웅크렸던 몸을 들어 올렸다.
테오.
렌바르트의 입술이 자각도 하지 못하고 테오의 이름을 소리도 없이 내뱉었다.
렌바르트는 저가 아카데미에 다녔을 적에, 당시 빈민가에서 데리고 와 아젤레트에게 붙여주었던 테오를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젤레트의 몸으로, 아젤레트를 애지중지하며 보살펴주는 테오를 보니 죄책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렌바르트의 눈동자에 깊은 어둠이 가라앉았지만, 테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테오의 모든 정신은, 그저 렌바르트의 눈에서 흐른 눈물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세상에, 도련님?! 왜 울어요! 어디 부딪혔어요? 많이 아파요? 그것도 아니면 어떤 못된 녀석이 우리 도련님 괴롭혔어요?”
한걸음에 달려와 렌바르트의 무릎을 꿇듯이 앉은 테오가 손을 뻗어 렌바르트의 뺨은 물론, 옷깃 사이로 드러난 부위들을 하나둘 살펴보기 시작했다.
렌바르트의 피부에 닿는 테오의 손길은, 한눈에 봐도 그가 아젤레트를 소중히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온 손길이었다.
그것에 렌바르트는 괜찮다고 하는 것도 잊고서 이제는 손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눈가를 닦아주는 테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슬퍼서 우신 거예요? 슬프셔도 당장엔 참아야 해요, 우리 도련님. 렌바르트 도련님의 장례식이 다 끝났다고 해도, 하관이 남았으니까요. 지금 실컷 울어두고, 하관할 때는 울면 안 돼요. 귀족들이 얕잡아 보고 우리 도련님을 더 노릴 수 있으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셔야 해요!”
부모가 아이에게 다짐을 받는 것과 다름없는 엄하지만 따스한 표정이었다.
만약 아젤레트가 테오의 말을 이렇게 듣는다고 해서, 그의 바람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렌바르트는 이렇게, 아젤레트를 ‘백치’라 차별하지 않고서 공평히, 그리고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테오의 태도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렌바르트는 바로 조금 전에 테오가 한 말을 다시 꼼꼼히 되새겨보았다. ‘렌바르트 도련님의 장례식’이 끝났다고 했다.
렌바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몸에, 혹은 기억에 새겨진 렌바르트의 감각은 그저 하룻밤 자고 일어난 뒤의 짧은 시간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감각이었다.
그런데 장례식의 완전한 끝을 알리는 하관 차례라니.
로프론트 가의 장례식은 길게 3주가 걸린다. 첫날에 친족들 앞에서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로프론트 가의 직계들만 묻힐 수 있는 공작가의 중심, ‘펠-로레니아’라는 이름의 지하묘소에 관을 묻는 것- 그것이 끝이었다. 지금이 그 끝의 과정이라니.
렌바르트는 자신이 죽은 지 적어도 3주 이상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에 놀라며,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테오의 강한 힘에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드릴게요, 도련님.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따 하관 차례에서 각하와 눈 마주치면 바로 피하세요. 꼭! 요즘 각하 방에 식사를 가져다주는 시녀들이 얼마나 죽어 가는지 아세요? 눈 마주쳤다고 물건 던지지, 혼자 중얼거리시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지. 뭐 하나 렌바르트 도련님과 닮은 점이 있으면 악착같이 달려드시니, 특히 도련님은 더! 조심하세요. 광증이 더 도지면 이젠 답도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테오?”
생각해볼 것도 없이 나온 물음이었다. 테오는 생각지도 못한 주인의 반문에, 구겨진 옷자락을 빳빳하게 펴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테오의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그러나 렌바르트는 놀란 테오의 반응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의문에 더 매달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물었어. 어서 대답해.”
아젤레트의 음성으로 나가는 자신의 목소리는 생소했지만, 그것에 소스라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렌바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테오가 이야기 하는 것이 분명 자신의 형님-, 렌바르트가 사랑하는 훼이온 폰 로프론트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테오의 입에서 나온 훼이온의 행동은 렌바르트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뿐이었다. 렌바르트가 알고 있는 훼이온은, 결코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을 이였다.
테오의 대답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렌바르트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이내 손을 움직였다.
허공에 멈춘 테오의 양손을 잡은 렌바르트가, 다시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테오가 크게 흔들렸다.
“세상에, 도련님, 도련님! 우리 도련님이 말, 말했……! 도련님,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도련님!”
너무나도 격렬한, 처음 보는 테오의 반응에 놀라 렌바르트는 조금 전의 초조함도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테오가 곧장 따라붙는다. 렌바르트는 결국 적응을 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작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람의 눈이 반짝인다는 말이 도통 어떤 것인지 몰랐었는데, 지금 테오의 눈을 보니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알게 되었다.
“꿈이 아니야.”
테오의 의문을 해결해주기 위한 대답이었으나, 그것은 스스로에게 내뱉었던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누구에게나.
렌바르트는 입안이 쓰게 느껴지는 것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렌바르트의 몸을 끌어안고서 춤이라도 출 것 같은 기색의 테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좀 전에 했던 말은 뭐지? 각하……형, 님께서 그런 행동을 하시다니?”
렌바르트가 살아있었을 때, 훼이온을 부르던 호칭을 고스란히 사용할 뻔했다.
서둘러 호칭을 고쳤으나, ‘형님’이라는 그 말이 너무나도 낯설어 한 박자 늦게 내뱉어졌다.
그러나 테오는 ‘아젤레트’가 범인(凡人)처럼 말했다는 사실 하나에 들떠있기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 넘겼다.
어쩌면, 모른 척 한 것일지도 모른다.
“흡, 정말, 도련님. 정말 기뻐요. 아, 제 마음은 조금 뒤에 열렬히 토로하겠습니다. 도련님, 말 그대로입니다. 각하께서 렌바르트 도련님의 시신을 수습한 뒤로,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제국 공인과 다름없는 광인(狂人)이 되셨어요. 갑자기 각하의 방에 텔레지아 꽃을 가득 채워 넣는다던가, 붉은 머리만 보면 렌바르트 도련님을 찾는다거나, 이상한 글씨를 계속 종이에 쉬지도 않고 쓰시고, 심할 때는 시종까지 웃으면서 때렸-헉! 호흡, 숨 쉬세요! 도련님!”
자신의 시신을 수습한 뒤로 훼이온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곤두박질쳤는데, 이 넓은 타노이스 제국에 널리 퍼질 정도로 미쳐버렸다니. ‘그’ 훼이온 폰 로프론트가.
렌바르트가 알고 있는 훼이온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녹아내리지 않을 영구동토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시신을 수습한 뒤에 미쳐? 렌바르트가 비틀거렸다.
테오가 서둘러 몸을 지탱하고,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서 망연자실하게 넋 놓고 있는 렌바르트의 등을 다독이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숨을 내뱉으라고 애절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렌바르트는 반사적으로 그 말에 따르며, 턱 막힌 숨을 기계적으로 내뱉었다.
테오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전혀 새겨지지 않고 있었다. 그저 훼이온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광인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형제가, 사랑하는 이가. 그것도 뚜렷한 계기를 가지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했다. 그 암흑이 낯익었다. 지금 자신의 심정 그 자체를 이렇게 뚜렷하게 표현해내는 색이 또 어디 있을까.
확신할 수 있었다. 훼이온이 미쳐버린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희생자가 적었던 그 전쟁에서, 로프론트 가의 차남이 죽었으니, 로프론트의 이름이 얼마나 땅바닥에 곤두박질쳤겠는가.
렌바르트는 훼이온이 누구보다도 로프론트 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악착같이 지키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렌바르트는 자신의 몸으로 살아있었을 때 로프론트 가의 명예에 흠이 갈까 두려워, 훼이온의 명령에 따라 대외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었다.
그런데 자신이 전사(戰死)했으니, 훼이온이 얼마나 수치스러워했을까.
실제로 렌바르트의 사인은 병사(病死)였지만, 만약 전쟁터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면 훼이온은 더 미쳐버리고, 장례의 절차도 밟을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젤레트의 몸을 빼앗아 이리도 추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에 광인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쌓여가는 자신의 죄의 무게에 렌바르트는 차마 눈을 뜰 생각도 못 하고 숨을 죽였다.
큰 소리로 울고 싶었지만, 우는 것마저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주먹을 쥐고 울음을 삼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도련님!”
뺨을 그러쥐었다. 눈을 떴다. 뺨에 닿는 낯선 감촉에 놀라 렌바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니, 얼굴의 바로 앞에는 꾸중하는 것처럼 엄한 표정의 테오가 묘하게 눈살을 찌푸리고서 렌바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렌바르트는 처음 보는 테오의 표정에 놀라 입술을 작게 벌렸다가, 입을 다물고 애써 담담한 척했다.
그러나 가슴은, 심장은 여전히 훼이온과 아젤레트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짓무른 고통을 호소하며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우실 거면 소리 내서 울어요. 보는 사람도 서럽잖아요? 우리 도련님은 항상 소리 없이 울어서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아세요? 자, 웃어 봐요.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웃는 거지만, 그래도 도련님께선 웃으셨으면 좋겠어요. 각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우신 거라면 걱정 마세요. 이제 괜찮아질 테니까요! 우리 도련님 보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이 테오가 장담합니다!”
쾌활한 목소리였다. 렌바르트가 아젤레트에게 찾아갈 때면, 테오가 항상 특유의 밝은 모습으로 맞이해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테오와 대화를 하다 보면, 신분을 막론하고 그 특유의 밝음에 전염되듯 마음이 차분해지며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젤레트와 있을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했다.
렌바르트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고, 테오는 렌바르트가 웃는 것을 보며 활짝 웃었다.
“왜 이렇게 예뻐요, 우리 도련님!”
“예쁘다니…….”
확실히 아젤레트가 웃는 모습은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나 렌바르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서 테오의 말을 부정했다. 멈칫했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거울 앞에서 웃어본 적이 없다. 표정 연습을 하긴 했어도, 그것은 전부 몸을 갉아먹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숨기기 위한 무표정뿐이었다.
‘렌바르트, 너는 웃지 마라. 십중팔구는 홀린다. 내가 장담하지.’
문득,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 현재는 제국의 대마법사가 되어있는 친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는 분명 웃었던 것 같은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훼이온을 호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웃어본 기억이 없다.
새삼스럽게 깨닫고 보니 씁쓸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좋은 추억 하나 없는 과거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웃음’이란 개념을 두고 보니, 한 가지, 자신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단 한 가지 미련이 남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훼이온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
훼이온이 웃기를 바랐다. 자신이 웃는 것보다, 본적 없는 훼이온의 미소가 더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훼이온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것도 모자라 그를 미치게 만들어버렸으니, 그가 웃기를 바라는 것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자 천장을 가득 채운 로프론트 가의 문장이 자연스레 시야에 들어왔다. 선 하나하나가 얽히며 섬세하고, 화려한 로프론트 가의 문장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빛이 예전같이 찬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렌바르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현 가주인 훼이온의 빛을 자신이 더럽혔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렌바르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염원에 스스로를 옭아매며, 훼이온을 되돌리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웃을 수 있도록, 더불어 자신에게 삶을 빼앗긴 아젤레트의 몸을 되돌려 주어, 사랑하는 형제끼리 웃을 수 있는 미래를 만들겠다고.
그 자리에 죽은 자신은 있을 수 없겠지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 훼이온과 아젤레트가 웃을 수 있는 미래가 찾아올 수 있다면, 자신의 무엇을 희생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바랐다. 자신이 존재하지 못할 미래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이 행복하게 웃는 미래가 오기를.
설령, 자신이 영영 잊혀 진다고 해도.